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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 ] <26> 동북아해역과 근대 지식의 수용·유통(하)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3-2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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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나라 때 상하이의 강남제조국 번역관에서 일하며 서양 지식을 중국에 전한 존 프라이어(John Fryer, 1839~1928·왼쪽 사진)와 존 프라이어가 청나라에서 펴낸 월간 ‘격치휘편’.

조선 왕실이 수집한 중국 자료를 소장한 서울의 규장각 내부 모습.

- 16세기 유럽 대항해시대 열려
- 서양인 동아시아 바다에 도달
- 중화문명권 변방국이었던 日
- 中 일변도 문화유입 상황 탈피

- 조선, 중국을 통해 서학 수용
- ‘북학’‘실학’ 등에 바탕됐지만
- 광범위한 기술분야엔 무관심
- 인식의 한계가 전파 더디게 해

- 19세기 초 정부·보수층 탄압에
- 서구 문물 유입 암흑기 맞아
- 선비들 관념적·이론적 성향 탓
- 그리스도교만 꾸준히 성장


- 1880년대 고종 위시한 관료들
- 상하이 ‘강남제조국…’등 출판한
- 한역서학서 다시 수입하지만
- 일제 식민지돼 오래가지 못해

조선에서 서학의 도입은 1603년 이광정이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한역 세계지도를 갖고 들어온 것을 기점으로 본다면 17세기 초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17세기는 바다의 시각에서 볼 때 ‘경합하는 바다’라는 규정이 본격화되었던 시대였다. 이미 16세기에 서구의 대항해시대가 열렸고, 이로 인해 서양인의 배가 명을 중심으로 한 조공·해금체제가 흔들리던 동아시아 해역에 도달했다.

(국제신문기사 2019-07-04 발췌)

기사전문<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90705.22017001552&kid=k27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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