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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 ] <14> 근대 상하이 거리 활보한 뜻밖의 한국 사람들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3-2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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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초대의원 기념사진. 이용우 기자 ywlee@kookje.co.kr

상하이 공공조계 모습. 안승웅 제공


- 근대 시기 동양 최대 국제도시
- 나라 잃은 정치인 망명지로 최적
- 30년대 초 한인 절반 항일열사

-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 일제 검열 강화돼 거처 옮겨
- 日 통제권 확대·자본 진출 맞춰
- 친일인사들 대거 따라 들어와

- 민족 억압한 악질적인 부역자들
- 이들과 관계 속에서 담금질했던
- 독립운동가 희생·헌신 더욱 빛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독립지사의 삶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백범 김구, 석오 이동녕, 청사 조성환, 몽양 여운형 등 익숙한 이름 외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지사들의 이름도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곤 한다. 이 중 영화 ‘암살’과 ‘밀정’ 등을 통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약산 김원봉의 경우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로 지금도 핫 이슈가 되고 있다. 적어도 올 한 해는 상하이하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1930년대를 기점으로 상하이에는 독립운동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 득세하는 형세가 이루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국제도시 상하이의 특수성 때문에 정치적 성향에 따라 한인이 거주하는 곳이 명확히 나누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상하이의 조계는 크게 미국과 영국의 공공조계와 프랑스 조계로 분리돼 있었는데, 영사의 직접적 관할하에 있었던 프랑스 조계에는 공공조계와 달리 일본이 함부로 경찰을 동원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조계에는 일본의 검열을 피해 독립운동가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공공조계에는 생계를 위해 일반 상인이나 노동자 그리고 친일 부역자들이 거주하게 됐다. 1935년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 조계에는 706명, 공공조계에는 986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이 상하이를 완전히 점령한 1940년대에는 이러한 구분도 사라지고 상하이에 남은 한인은 대부분 친일적인 인물이었다.

(국제신문기사 2019-04-11 발췌)

기사전문<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90412.22017004522&kid=k27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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