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자료

[연재-'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 ] <7> 재일제주인의 고향 사랑과 감귤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3-24 16:45

본문

눈 덮인 한라산을 배경으로 제주도의 감귤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다. 국제신문 DB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이쿠노 코리아타운 전경. 일본 위키피디아

- 11세기 고려 때 감귤 진상 기록
- 그 이전부터 재배됐다고 추정
- 기술·자본 없어 대량재배 못해
- 진상 위한 소규모 농장만 운영

- 전후 황폐한 농촌 살리기 일환
- 박정희 정권 재배 장려했지만
- 묘목 없어 수요 채우기 역부족

- 일제 때 오사카 정착 제주인들
- 1965년부터 묘목 기증 시작
- 300만 그루 이상 바다 건너와

- ‘제주도 하면 감귤’ 공식 뒤엔
- 끈끈하게 뭉쳐 유대감 다진
- 섬사람 애향심과 그리움 있어

새콤달콤한 맛에 손으로 껍질을 깔 수 있는 간편함 그리고 풍부한 영양소로 사랑받는 과일, 바로 감귤이다. 요즘에는 하우스 재배도 많아져 겨울뿐 아니라 거의 1년 내내 먹는 우리의 대표 과일 중 하나이다. 그리고 ‘감귤 하면 제주도, 제주도 하면 감귤’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식일 것이다. 이러한 공식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제주도에서 감귤이 재배된 것이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11세기에 이미 탐라국으로부터 고려 왕조에 감귤이 진상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이전에 중국에서 전파돼 재배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도 진상을 위해 과수원을 만들어 감귤을 재배하였으나, 대량 재배는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나름 규모가 큰 농장을 개설했지만, 기술과 자본이 많이 필요한 감귤 농사가 조선인에게까지 확대되지는 못했다.

결국 오늘날같이 제주도에서 감귤 농사가 널리 이뤄진 것은 해방 이후, 그것도 4·3 항쟁으로 피폐해진 농촌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1955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제주도의 감귤 재배 면적은 18㏊에 불과했지만, 1964년에는 407㏊까지 늘어난다.

재일제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식민지 조선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진 조선인은 1920년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일이 많아졌다. 일본으로 건너가려면 배(기선)를 타야 했고, 기선을 탈 수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에 이주하는 조선인이 늘어났는데, 그중 한 곳이 제주도였다. 부산에서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을 타고 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졌다. 그러나 제주도 또한 부산만큼이나 일본으로 가는 이동의 중요한 기점이었다.

일본으로 이주하는 제주인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계기는 1923년 제주도와 일본 오사카(大阪) 사이의 항로 개설이다. 처음 제주도~오사카 기선을 취항한 회사는 아마가사키(尼崎) 기선 한 군데였고 기선 한 척을 운항할 뿐이었다

(국제신문기사 2019-02-21 발췌)
기사전문<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90222.22025004566&kid=k27003>

Copyrights (C) 2018 동북아해역과 인문네트워크의 역동성 연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