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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이 지식의 차원에서 어떻게 전세계에 연구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 가운데중국인들은 자신을 어떻게 학문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는지를 ‘국학’이란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1990년대 후반 ‘국학’에 대한 분석에서 중국의 연구자들은 학문 영역으로서 국학의 해석은 두 가지 패러다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은 바로 토착주의와 세계주의 패러다임이다. 다시 말해 근대 백 여 년의 역사에서 국학과 관련된 학술적 논의가 반복해서 이 두 패러다임으로 작동해왔다는 말이다. 토착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첫 번째 패러다임은 장타이옌(章太炎)으로 대표되는 만청과 공화정부 초기의 학문이고, 후자는 오사신문화운동의 산물로서 후스(胡適)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이 ‘국학’의 형성과정에 동북아해역의 인문네트워크적 계기가 어떻게작동했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중국에서 ‘국학’은 서학에 대한 대응학문으로서 또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에 필요한 기초학문으로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이 성립되는과정에 메이지 일본의 국수보존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또 실제적인 연구에서도 일본 동양학의 성과가 수용되기도 했다. 그 결과 중국의 ‘국학’은 일본의 지나학과 서로 관계를맺으면서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 국가의 고유한 것만을 추구한다는‘국학’은 사실은 하나의 운동이며, 또 폐쇄적인 공간에서 탄생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키워드: 국학, 한학, 후스, 장타이옌, 량치차오, 유학, 일본 동양학, 루쉰, 인문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