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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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목
      新한류 속 언어차용과 문화교류-중국 팬덤용어 번역사례 분석과 고찰
    • 저자
      엄지
    • 발행처
      한국문화융합학회
    • 발행년
      2023, vol.45, no.11, 통권 111호 pp. 849-858 (10 pages)
    본고의 목적은 新한류 속 팬덤용어의 중국어 번역사례를 분석하여 변화하는 언어·문화접촉 양상을 살펴보는 데 있다. 최근 新한류 열풍을 타고 팬덤용어와 표현을 중심으로 한자어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언어접촉과 번역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이전까지 젊은 층 사이에서 일시적인 유행에 지나지 않았던 단편적인 한국어 표현들이 이제는 수년간 계속 사용되는 것을 넘어 파생 표현과 정형화된 번역 패턴을보이는 고유 표현으로까지 정착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한자문화권 형성에 강력한 영향력을행사했던 중국어를 우선하여 번역사례를 분석하고 몇 가지 의미 있는 특징을 도출해내었다. 이를 바탕으로 新한류 속 글로벌팬덤의 형성과 함께 그 안에서 사용되는 팬덤용어를 중심으로 진행된 새로운 언어접촉 양상이 그동안의 아시아적 문화 경계를 허물고 세계화의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discuss the changing aspects of language and cultural contact, focusing on the case of Chinese translation of fandom terminology in the new Korean Wave. Following the craze of the new Korean Wave, new cases of language contact and translation are emerging, focusing on fandom terminology and expressions. Fragmentary Korean expressions, which used to be nothing more than a temporary trend among young people, have now been used for years. Furthermore, it is becoming established as a unique expression showing derivative expressions and formalized translation patterns. This paper first analyzed the translation cases of Chinese, which had a strong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the Chinese character cultural sphere, and as a result, several meaningful characteristics were derived. Based on this, it is worth noting that the formation of global fandom and the new language contact pattern centered on fandom terms have broken down Asian cultural boundaries and acted as an important medium for global
    • 제 목
      일제식민지기 멸치 수산업과 남해안 지족해협 죽방렴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 저자
      문혜진 /Mun HeaJin
    • 발행처
      무형유산학회
    • 발행년
      2023, vol.8, no.2, pp. 35-62 (28 pages)
    남해군 지족해협에는 명승(제71호), 국가무형문화재 138-1호, 국가중요어업유산 제3호로 지정된 죽방렴 23개가 멸치잡이를 하고 있다. 남해안 죽방렴은 V자형으로 참나무와 대나무를 박고 주렴처럼 엮어서 그물을 설치하여, 조수의 간만 차를 이용하여 꼭짓점 원통 속에 갇힌 멸치를 잡는 전통 함정어구이다. 남해군 죽방렴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어구로서 최근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신청에 앞서 죽방렴의 원형에 대한 고증을 다시 하고 있다. 기존의 학계에서는 남해군 죽방렴 멸치잡이의 역사를 남해군 방렴[어량]의 역사로 오인하여 400~5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죽방렴과 멸치잡이의 역사를 분리하여 실증적으로 재검토하고자 한다. 방렴은 구한말까지 대구와 청어를 잡는 어구였지만, 학계와 남해군 죽방렴 운영자들은 전통적으로 멸치잡이 어구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남해군 죽방렴에서 멸치잡이를 전문적으로 한다는 사료는 『물고기의 길잡이』(1938)에 최초로 나타난다. 조선시대 멸치는 수산물로서의 가치가 낮았지만 개항 이후 어비[호시카]에 대한 일본 수출 수요가 증가하면서 남해군 죽방렴에서도 1913년부터 멸치를 주요 어종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남해안 지족해협 죽방렴의 멸치잡이가 멸치 수산업의 성장과 함께 일제식민지기에 시작되었다는 가설 하에,『조선총독부통계연보』·『조선총독부관보』, 그 외 일제식민지기 수산 관련 사료·신문 등을 통해 이를 검증해 보고자 한다. In the Jijok Strait of Namhae-gun, 23 bamboo fishing weirs designated as scenic spots(No. 71), National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138-1, and National Important Fisheries Heritage No. 3 are catching anchovies. A bamboo fishing weir in Namhae-gun is a traditional trap, which is constructed by inserting oak and bamboo in a V-shape and weaving it like a net; it is designed to catch anchovies, using the tidal difference. Preservation society for Bamboo fishing weirs and scholars have recently been verifying its prototype before applying for registration as a world-important agricultural heritage. Previous researches estimate that the history of catching anchovies using bamboo fishing weirs in Namhae-gun is 400 to 500 years old; it results from misunderstanding the history of bamboo fishing weirs in Namhae-gun as that of anchovy fishing. Therefore, in this paper, I would like to separate the history of bamboo fishing weir and anchovy fishing in Namhae-gun and then study it empirically. Bamboo fishing weir was a fishing gear for catching cod and herring until the Joseon Dynasty. During the Joseon Dynasty, anchovies were of low value as a marine product, but as the demand for export to Japan increased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fishermen in Namhae-gun began to catch anchovies mainly from 1913. Accordingly, under the hypothesis that anchovy fishing of bamboo fishing weirs in Namhae-gun began with the growth of the anchovy fisheries industr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paper will clarify it using the statistical yearbook and official Gazette of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and other materials such as historical records related to Japanese colonial fisheries, newspapers and so on.
    • 제 목
      연근해어업에서의 이주노동자 수용제도의 한일 비교: 장기 고용으로의 변화에 주목하여
    • 저자
      최민경
    • 발행처
      중앙대학교 문화콘텐츠기술연구원/다문화콘텐츠연구
    • 발행년
      2023, vol., no.45, pp. 295-325 (31 pages)
    본 연구에서는 인구 및 산업 구조의 급격한 변화 속, 한국과 일본의 연근해어업 분야에서 이주노동자의 수용 제도가 그들의 장기 고용이 가능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그러한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과논리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지를 비교 분석하였다. 한국은 연근해어업으로유입하는 이주노동자의 규모를 점진적으로 늘리면서 그 중 ‘성실함’을 증명받는 자에게 장기 고용과 체류의 가능성을 열었다. 한편 ‘숙련됨’에 대한평가는 기본적으로 ‘성실함’과 짝을 이루며, 별도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반면에 일본은 이주노동자의 장기 고용을 위해 기능 자체의 재정의가 이뤄졌다. 연근해어업을 ‘특정산업분야’로서 고유의 ‘상당한 정도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전문적・기술적 분야로 간주하는 방식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이러한 자리매김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유입하는 이주노동자의 경우 그 기능 수준이 결코 높지 않다는 점이다. 이처럼 최근 한일 양국의 연근해어업에서 이주노동자 관련 제도가 변화하는 양상은 다양한 차원에서 제도 자체의 모순됨을 내포한다. 그리고 한일 양국의 비교 분석은 서로가 지니는 모순됨을 비춰보고 향후 정책적 함의를 모색한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 제 목
      수산업을 통한 지역사회의 연대활동과 글로벌 수산식품 유통 네트워크: 구룡포를 중심으로
    • 저자
      공미희
    • 발행처
      지역사회학회/지역사회학(Korean Regional Sociology) (KRS)
    • 발행년
      2023, vol.24, no.2, 통권 55호 pp. 67-102 (36 pages)
    본고는 구룡포 수산업의 역사적 배경 및 특징에 대해서 고찰하고,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 주최의 풍어제와 포항구룡포과 메기사업협동조합 주최의 과메기축제를 중심으로 수산업을 통한 지역사회의 시민연대활동에 대해서 분석했다. 그리고 구룡포 대표적 수산식품의 글로벌 유통 네트워크에 대해서 먼저 신문기사를 통해서 고찰했고 한층 현지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구룡포 국외수출업체의 인터뷰로서 과메기 유통네트워크에 대해서 분석했다. 구룡포수산업은 청동기유적 어망추(그물추) 유물출토로 청동기시대부터 거슬려 올라갈 수 있고 특히 구룡포과메기 수산식품의 어종인 청어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가장 중요한 어류자원의 하나였다. 개항이후 일본인들이 한반도지역으로 많은 이주를 했고, 일본인의 이주어촌형성과 이주민정착이 시작되면서 구룡포는 빠르게 변화했다. 해안에 연한 간선도로를 따라 길게 확장되었던 이주민들의 주거단지에는 중요한 기관설비가 갖추어지면서 공동작업장과 어판장, 수산물운반업소, 조선소, 통조림공장, 선구점, 어구점, 창고 등 각종시설들이 자리를 잡았다. 구룡포의 대표적인 어종은 일본인이 통어를 하던 초기에는 삼치와 청어, 정어리가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청어는 1950년대 이후부터 거의 잡히지 않았고, 중반에 이미 청어를 대신하여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고 있었다. 꽁치는 1960년대 초에서 1980년대까지 동해안의 대표적인 어종으로 꼽힐 만큼 많이 어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민들은 어로 시에는 풍랑으로 인한 인명피해, 자연재해 등에 대해서 항상 불안한 마음을 가졌다. 이에 선주협회에서는 어업인들의 안전조업 및 대풍어를 기원해 소득증대를 바라는 어민들의 바람이 실시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구룡포 풍어제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주협회는 풍어제에 소요되는 경비문제로 난황에 부딪혀 수협에 부탁을 했고 이에 구룡포수협이 2005년부터 4년에 한 번씩 풍어제를 개최한다. 비록 수협주최로 풍어제가 실시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진행과정을 보면 수협과 시민들과의 연대활동을 비롯해서 시민들 간의 연대활동도 다양하게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구룡포 과메기축제를 통해서도 과메기사업협동조합, 상인, 시민들과의 연대활동이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글로벌수산식품의 유통 네트워크에 관한 분석으로서는 먼저 신문기사 보도 자료로서 특징을 고찰했고 좀 더 현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구룡포 국외수출업체의 인터뷰를 실시했다. 그 결과 과메기 수출은 북미나 유럽, 그리고 동남아 등의 지역이 해당되었고, 또 국외수출이 국내 판매보다는 절차부터 시작해서 해외에서의 시식회 및 홍보방법, 다양한 국가로의 유통네트워크 확장, 고객관리, 경제적 비용, 소극적인 정부지원 등 여러 면에서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 현재의 실태였다. 이에 포항시를 비롯한 구룡포에서는 수산식품 유통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여 지속적인 연구와 개선이 이루어져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글로벌 수산식품 유통 네트워크를 확장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제 목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일본어 교육의 통사적 연구
    • 저자
      이상원
    • 발행처
      대한일어일문학회/일어일문학 (JALALIKA)
    • 발행년
      2023, vol., no.99, pp. 26-42 (17 pages)
    본 논문은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시대에 걸친 일본어교육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행해진 일본어교육의 양상을 살펴보고, 해방 이후 왜색일소, 일본문화와 일본어 잔재가철저히 배제되는 역사적·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생겨난 일본어교육의 필요성 대두와 대중들의 인식에 대하여정치‧사회적 문맥과 상호작용에 입각하여 통사적으로 살펴보았다. 한국은 과거 35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아 ‘국어’로서의 일본어를 강요당해 온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한일합방 이전부터 일제의 통감부는‘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사립 교육기관을 강제적으로 탄압하였고, 조선총독부는 1911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식민지 조선의 학령기 아동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도권 교육기관의 조선어 과목은 수의(随意)과목으로 전락하였고 일본어 과목명은 국어로 바뀌었고, ‘학술 강습회’와 같은사회적 교육기관은 일본의 간섭과 탄압을 통해 일본어 전문 교육기관으로 변질되어 갔다. 일본어교육은 일제와 친일단체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고 일본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지역에서는 일본어 학습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해방 이후 1960년까지 철저한 반공, 반일 정책을 취했고 학교 등의 교육시설에서는 일본어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공백기(1945년-1960년)로 볼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왜색 문화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반일 및배일 관념이 매우 심화된 시기였다.1965년 한일기본조약 협정 이후, 한일 간 활발한 교류와 함께 문교부의 사설 일본어 강습소의 허가, 대학에서의 일본어과 설치 승인 등, 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일본어교육이 재보급되는 시기(1961년-1971년)로 접어들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협정 이후 양국의 경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일본 기업이 저렴한 한국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한국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면서 무역 교류가 증대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어 수요는 증가했고 일본어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시기였다. 1972년 일본어 강습소가 허가되고 1973년부터 일본어가 고등학교제2외국어로 지정된다. 재차 일본어교육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어려웠지만 그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고 박정희 정권은 나라발전을 위해 필요한 언어임을 강조하였고 ‘국민교육헌장’과 ‘국적있는교육’을 제창하면서 일본어교육을 정당화했다. 이후 일본관련 학술단체의 설립과 대학에서의 일본어 관련 학과의 개설 등으로일본어교육이 정착하면서 도약기(1972년-1979년)를 맞이하게 된다.
    • 제 목
      근세 세계화(archaic globalisation)의 맥락에서 본 조선시대사
    • 저자
      신상원
    • 발행처
      부경역사연구소/지역과 역사
    • 발행년
      2023, vol., no.53, pp. 145-197 (53 pages)
    유럽 내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는 한국학 (Korean Studies)이라고 하는 분과 아래에서 행해지고 있다. 한국학은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역사 등 종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지역학의 하나이다. 당연히 이런 종합적인 이해를 위한 노력으로 인해 다양한 주제와 시기를 넘나들므로, 한국학이 다루는 범위는 아주 넓다. 당대 한국과 역사 속의 한국,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한국까지 포함하는 학문 분야인 것이다. 한국학의 조선시대사 연구는 이런 넓은 범위 안의 한 분과이다. 유럽 내에서 한국의 관심 증가에 따라 이런 한국학과 그 분과인 조선시대사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전근대시기 보다는 근대 그리고 현대시기에 집중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전근대시기 연구에서는, 조선후기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며, 고대시기나 고려시기는, 원래부터 연구가 많지 않은 분야인 전근대 시기에서도 더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내 조선시대사 연구는 의미있는 연구 결과들을 내놓고 있다. 이들은 영미권의 세계화 연구 경향에 따라 연구되어, 세계사와 동아시아사적 차원에서 조선시대사를 보는 경향이 크다. 본 논문은 최근의 이런 유럽 내 조선시대사 연구들을 통해, 세계화의 맥락에서의 한국사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 제 목
      해역의 시각에서 다시 보는 세계화 그리고 동북아해역
    • 저자
      서광덕
    • 발행처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해항도시문화교섭학 (CISSPC)
    • 발행년
      2023, vol.29, no.29, 통권 29호 pp. 91-120 (30 pages)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시작된 ‘세계화’는 원래 세계경제가 실시간에 하나의 단위로 작동하는 단일체제로 통합되는 과정으로,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시장과 노동을 신자유주의 방식으로 재편하면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한 전세계의 대응이 다양하게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세계화’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주 먼 곳까지 영향을 미치는 지구적인 규모의 상호의존성이 강화되는 현상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게다가 정보통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인터넷에서 개인과 세계가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고, 이러한 정보통신이 발달이 지금까지 개인과 집단이 영향을 주고받는 최대 단위였던 ‘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전지구적인 세계화를 촉진하였다. 이 글은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갖는 ‘세계화’가 지역 특히 동북아해역에서 어떻게 현상했는지, 또 동북아해역을 과연 로컬로서 정의할 수 있는지를 탐문해보았다. 많은 학문분야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진 세계화와 관련한 연구 성과를 해역(의 시각)에 맞추어 재해석하고, 또 동북아해역 곧 리저널리즘과 연계된 해역 그래서 ‘동아지중해’ 등과 같은 환해양권역 개념의 등장과도 연결해서 살펴보았다. 이와 더불어 최근 동북아 각 해역에서 전개된 해역도시의 확장 그리고 해역도시들간의 네트워크 형성으로 나타난 메가지역 구상과 추진 등이 지닌 의미를 분석해보았다. 특히 최근 부울경 메가시티 구상과 가덕도 신공항 건설 등의 부산 사례를 중심으로 해역에서 도시의 확장과 어촌의 소멸이란 문제에 대해 검토하고, 이러한 사례들이 동북아지역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 세계화가 해역에서 드러나는 특수성을 밝히고, 그 결과 동북아해역도 로컬로서 규정할 수 있다면, 동북아해역에서 글로컬리제이션 또는 로컬의 국제화는 결국 바다를 끼고 있는 해역간의 네트워크에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 제 목
      일제식민지기 고토히라신사[金刀比羅神社]의 건립양상과 해양신앙
    • 저자
      문혜진
    • 발행처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해항도시문화교섭학 (CISSPC)
    • 발행년
      2023, vol.29, no.29, 통권 29호 pp. 281-320 (40 pages)
    「조일수호조규」 이후 한일병합 이전까지 조선에는 총 10개의 항구가 개항되었다. 이들 개항지에서의 일본 어민들의 통어가 합법화되기 시작하며 자유이주어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03년 조선해수산조합이 창립되면서 일본 각 지방에서 지원을 받는 보조이주어촌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개항장에 조성된 이주어촌이나 보조이주어촌에서 고토히라신사가 창건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토히라신은 일본의 어촌에서 해양신으로 스미요시, 에비스와 함께 가장 많이 모셔지는 신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아마테라스가 황조신으로 일본 민족의 우월성 혹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모셔졌다면 고토히라는 개항장으로의 일본 어민의 진출과 해양신앙을 나타낸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1909~1912)에 따르면, 구한말 조선의 개항장 및 보조이주어촌에 고토히라신를 비롯한 해양신사는 8사(31%)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해방 전까지 『통계연보』에 기재된 고토히라신사는 총 6사(0.6%)에 불과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구한말 개항장을 비롯한 보조이주어촌에 창건된 고토히라신사의 건립 양상과 변모 양상을 살펴본 후 식민지 조선에서 고토히라신사의 수가 적은 이유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식민지 조선의 고토히라신사에 있어서 해양신앙을 검토하여 식민지 이주어촌에서 고토히라신사가 제일 먼저 창건되는 배경을 파악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개항 이후 조선의 연근해로 이주한 일본인 이주 어민과 해양신앙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본 연구는 개항 도시에 창건된 거류민봉제신사의 해양신앙을 통해 식민지 신사의 다원성과 지역적 특성을 잘 보여줄 것으로 생각된다.
    • 제 목
      군항도시 사세보(佐世保)의 관광도시 전환 과정의 설계와 실천 : 하우스텐보스(Huis Ten Bosch) 설…
    • 저자
      이상원
    • 발행처
      한국정치사회연구소/한국과 국제사회 (코발소)
    • 발행년
      2023, vol.7, no.5, 통권 29호 pp. 863-885 (23 pages)
    이 연구는 일본 규슈 북쪽 서단(西端)에 위치한 작은 도시지만, 제1,2차 세계대전에서 구(舊)일본 해군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맡은 군항도시 사세보(佐世保)가 관광도시로 전환되는 그 과정의 설계와 실천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83년 개장한 나가사키(長崎) ‘오란다무라(Holland Village)’는 지역경제에 많은 파급효과를 가져왔고, 1992년 개장한 ‘하우스텐보스(Huis Ten Bosch)’는 관광도시로의 전환에 있어 ‘결정체’와 같은 역할을 했다. 오랜 기간 군항도시의 역할이 지속된 사세보는 전전기(戦前期)와 전후기(戦後期)를 거치며 어두운 전쟁의 체험과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사세보 시민들이 염원하던 ‘평화산업항만도시’로의 전환에 있어 결정체 역할을 한 ‘하우스텐보스’의 개장은 마치 어두운 전쟁의 역사의 흔적을 지우듯 나가사키의 역사와 문화라는 옷을 입혀 그 부지위에 자리 잡았다. 하우스텐보스가 조성된 부지는 전전기에는 해군병교 하리오(針尾)분교가, 전후기에는 인양자들의 숙소이자 인양 원호국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었다. 이처럼 사세보의 어두운 역사의 땅 위에 하우스텐보스가 지어지며 군항도시에서 관광도시로 전환된 과정을 흥미롭게 살펴보고자 한다.
    • 제 목
      가덕도 어촌의 근현대 공유재의 변천사 -가덕도 마을어장의 식민지 자원수탈과 부산신항 영향의 사례연구-
    • 저자
      문혜진
    • 발행처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도서문화』 (JIC)
    • 발행년
      2023, vol., no.61, pp. 71-97 (27 pages)
    가덕도는 조선시대부터 대구어장이 성행하였으며, 1904년에는 의친왕이 가덕도 일대의 대구어장을 사점화하여 1906년 가시이 겐타로[香推源太郞]에게 20년간 대여하였다. 가시이는 1908년 「한국어업법」에 근거하여 71개소 어장에 대한 면허를 받아, 조선인 어민에게 고율의 대부료를 받아 가덕도의 어장을 수탈하였다. 또한 새 어업법에 대한 무지로 조선인 관리에 의해서 혹은 가덕도 어민 간에도 어업조합의 헤게모니에 따라 점유와 착취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마을 공동어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어업조합원 간에, 혹은 눌차동과 동선동 마을 간에 분쟁이 발생하였지만 1962년 「수협법」의 공포로 지선어장의 경계가 정해지면서 일단락되었다. 즉, 「수협법」의 공포로 어촌별 마을어장은 커뮤니티(community)의 공유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1997년 부산신항이 건설되면서, 가덕도 어민들은 삶의 터전인 바다를 부산신항 부지, 즉 공공개발 부지로 내어주면서 마을어장의 어업 면허권과 어선어업을 할 수 있는 배 면허권이 소멸되면서 생존권을 박탈당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가덕도 마을어장의 변천사를 살펴보면서, 공공개발에 밀려 마을어장을 공공(public)에 환원하면서 발생하는 어촌 공유재의 소유권 문제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 제 목
      가덕도 일본군 군사시설 사적지의 다크 투어리즘 가치 재고
    • 저자
      이상원
    • 발행처
      인문사회 21/인문사회 21 (인문사회 21)
    • 발행년
      2023, vol.14, no.3, 통권 58호 pp. 3029-3042 (14 pages)
    가덕도 일본군 군사시설 사적지의 다크 투어리즘 가치 재고이 상 원** 연구 목적: 이 연구의 목적은 가덕도 일본군 군사시설 사적지를 ‘다크헤리티지’의 현장이자 ‘다크투어리즘’의 장소로 자리매김을 목적으로 하고 그 가치를 재고하고자 한다. 연구 방법: 다크투어리즘의 이론적 고찰과 현장 답사를 병행한 사료분석, 현존하는 군사시설 조사를 통해 지속가능한 다크투어리즘 사적지로서의 가치를 재고한다. 연구 내용: 부산은 도심 곳곳에 다크투어리즘의 관광자원이 산재해 있다. 최근 대두되는 가덕도 신공항 건설과 함께 가덕도 내 문화유산 등에 관심이 쏠린다. 정부는 2030년 엑스포 유치와 연계하여 속도가 붙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은 5년 이상 앞당겨져 2029년 12월에 개항할 계획을 밝히는데, 가덕도 내의 일본군 군사시설 사적지를 다크헤리티지의 현장이자 다크투어리즘의 장소로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가치를 재고하고자 한다. 결론 및 제언: 가덕도 신공항 건설은 불가역적 국책사업이지만 가덕도 일본군 군사시설 사적지에 대하여 보존 가치를 진단하여 철거 대상이 아닌 보존의 장소자산으로 인식하여 미래 세대의 역사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형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에 다크투어리즘 사적지로서의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핵심어: 가덕도, 다크투어리즘, 다크헤리티지, 사적지, 신공항 건설
    • 제 목
      군항도시 사세보(佐世保)의 유흥공간 변천
    • 저자
      이상원
    • 발행처
      동북아시아문화학회/동북아 문화연구
    • 발행년
      2023, vol.1, no.75, pp. 25-37 (13 pages)
    As for the entertainment space in Sasebo, from 1889, when the old headquarters was established, during the pre-war period, brothels and kashizashiki (貸座敷) were created. With the Katsutomi Yukaku and Hanazono Yukoku as the center, Aiura and Haiki Yukura were also established. Around 1937, it reached its peak of prosperity, and there were more than 1,000 prostitutes in only two brothel districts, Katsutomi and Hanazono. However, the Sino-Japanese War began, and the influence of the war could not be avoided even among prostitutes. Some were mobilized to factories for military production or converted to farming to make a living. Due to the Sasebo air raid on June 29, 1945, at the end of the Pacific War, the Katsutomi and Hanazono brothel areas were burnt down, districts of which lost their function. As the Allied Forces entered Sasebo after the defeat on August 15, 1945, the Sasebo City Hall and City Police Station gathered the owners and prostitutes of Katsutomi and Hanazono, which had been destroyed by the war, and instructed to set up brothels for the military. In the end, it was installed as a space dedicated to prostitution for soldiers and civilian employees under the name of ‘Special Teahouse Street’. The Korean War broke out in 1950, and the Allied Forces Command was established in Sasebo. Sasebo, which became a base for sending troops to Korea and supplying military supplies, was overflowing with soldiers crossing to the battlefield and returning from vacations from the battlefield, and foreigner bars also prospered together. On July 27, 1953, an armistice agreement was signed in the Korean War, and Sasebo's entertainment district again flourished due to the returning soldiers through Sasebo Port. However, due to the closure of the US military base, Aiura Camp, and the Japanese government's deflationary policy, sekikashi for foreigners also decreases. In March 1950, the entertainment space, which was divided into foreigners and Japanese by the Relocation Committee, was organized as one in Katsutomi-cho, Goten-cho and Gion-cho. The reorganized Katsutomi/Hanazono Yukaku did not last again, and in March before the Prostitution Prevention Act took effect on April 1, 1958, the sekikashi business was closed and changed to an inn. In this way, we examined how the entertainment space of Sasebo has changed since 1889, when the old headquarters was established, through the prewar and postwar periods.
    • 제 목
      부산 가덕도 숭어들이 어업과 해양신앙 – 대항어촌계 숭어들이 마을어장의 소멸과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대한 대…
    • 저자
      문혜진
    • 발행처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로컬리티 인문학
    • 발행년
      2023, vol., no.29, pp. 7-35 (29 pages)
    대항마을 숭어들이는 여섯 척의 배가 바닷속에 그물을 깔아 놓고 기다리다가 숭어가 지나가면 일제히 그물을 끌어올려 잡는 전통어업 육소장망이다. 이러한 전통어법은 선원수급의 문제로 2012년 거제도에서 기계식 양망기를 도입하면서 반기계식 육소장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육소장망이 반기계식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전통 어법의 방식은 유지되기 때문에, 거제시에는 반기계식 육소장망의 국가중요어업유산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부산시 유일의 대항마을 숭어들이는 초대 어로장 김국진 이래 170년을 이어오고 있다. 숭어가 들어오는지 살펴보는 망대를 지키는 어로장이 되려면 물 때, 물색, 바람, 숭어 특성, 오는 방향, 숭어무리의 형태에 따른 그물 조이는 방식 등 숭어들이 특유의 어법에 대한 전통지식을 배워야 한다. 지금도 어로장의 이러한 전통지식에 근거해서 숭어를 잡고 있으며, 대항동의 128명의 어촌계는 봄철 숭어들이로 연간 4~5억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숭어들이의 수장 어로장은 사후 제당의 위패로 모시는 신이 되며 숭어들이 고사의 해양신앙이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2020년 가덕도 대항동이 신공항 부지로 선정되면서 170년을 이어져 온 대항마을 숭어들이 전승이 단절되게 생겼다. 이에 본고에서는 대항마을 숭어들이와 고사에 대한 현지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가덕도 숭어들이 문화의 변천사를 재구성하여 어업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나서 가덕도 신공항 건설로 인한 어촌마을의 소멸과 어부의 삶의 변화를 대항동 어부들의 인터뷰를 통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 제 목
      Robert Morrison의 A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 편찬과동서 …
    • 저자
      엄지
    • 발행처
      인문사회 21/인문사회 21 (인문사회 21)
    • 발행년
      2023, vol.14, no.1, 통권 56호 pp. 295-310 (16 pages)
    Robert Morrison의 A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 편찬과동서 해역교류의 발전엄 지** 연구 목적: 이 연구는 Robert Morrison이 편찬한 A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의 연구 가치와 중요성을 제고하고, 근대 이중언어 자료의 발굴과 연구 필요성을 알리는 데 있다. 연구 방법: 전통적 문헌 분석의 방식을 따라 위 사전의 음운체계, 어휘수록 방식과 내용 구성 특징을 면밀히 살펴보고, 동시에 선행연구와 당시 문헌들의 기록을 함께 비교, 고찰하였다. 연구 내용: Morrison은 위 사전에서 현실 남경음(南京音)을 체계적으로 반영하고, 어휘에 관한 다양한 용례와 설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선교 목적을 넘어 영중(英中) 간의 상호 이해를 중시하고, 독자 중심의 실용성과 대중성을 추구하였다. 결론 및 제언: 위 사전은 근대 동서 해역교류의 매개체이자 문화 상대주의적 시각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상호 협력적인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핵심어: Robert Morrison, A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 중국어, 서양 선교사, 동서교류 □ 접수일: 2023년 1월 5일, 수정일: 2023년 1월 22일, 게재확정일: 2023년 2월 20일* 이 논문은 2017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7S1A6A3A01079869). **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HK연구교수(Professor, Pukyong National Univ., Email:
    • 제 목
      일제강점기 해양소년단과 조직화되는 소국민-조선공민교육회와 잡지『해국소년』을 중심으로-
    • 저자
      임상민
    • 발행처
      한국일본문화학회/日本文化學報
    • 발행년
      2023, vol., no.96, pp. 269-290 (22 pages)
    本稿では1944年に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朝鮮で発行された日本語雑誌『海国少年』を中心に、大日本海洋少年団朝鮮本部の結成過程と朝鮮人児童を総力戦に備えた予備軍として組織化していく同時代的意味について考察することを目的とした。特に1940年代に植民地朝鮮で発行された日本語雑誌と同誌を発行した朝鮮公民教育会、そして朝鮮総督府と朝鮮軍(特に朝鮮に駐屯していた日本海軍)をめぐる相互交渉的な関係性について究明することを試みた。 その結果、『海国少年』は朝鮮総督府当局の宣撫工作の一つであり、当時の戦時状況が悪化すればするほど、海軍に優秀な人材を送るために編集された雑誌であった。特に、徴兵制度と大日本帝国のために軍隊に入隊することは「義務」ではなく「権利」であると強調しながら、植民地朝鮮人の貧困と差別的な階層性を隠蔽させ、「天皇の嫡子」としての帝国日本の小国民意識を移植させていった。 現在、『海国少年』を読むということは平凡な朝鮮人少年である小国民を総力戦に備えて予備兵として組織化していくプロセスを究明することであり、それは単に日本内地と朝鮮外地、植民地と被植民地、朝鮮人と日本人のように二分法的に捉えるのではなく、当時の朝鮮総督府と日本軍、学校、そして出版社を含む新聞雑誌メディアがそれぞれどのような思惑の下で一体化していったのかを解明することに他ならない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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