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개항 이후 부산은 조선·일본·서구의 혼종”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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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부산 용두산 서쪽에 자리 잡은 일본인 거주지 전경. 소명출판 제공 1887년 부산 용두산 서쪽에 자리 잡은 일본인 거주지 전경. 소명출판 제공

1876년 개항 이후 부산에 초량 왜관을 중심으로 일본 조계가 설치됐다. 이곳은 일본인의 거주와 상업을 위한 영역이었고 식민 지배로 세력을 떨쳤던 권력 공간이었다. 일본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장소였으며 식민지 지배 집단인 일본인들의 우월감과 상징성이 반영된 공간이었다. 개항 이후 부산은 말 그대로 ‘조선 속의 일본’을 뜻하는 ‘일국(一國) 속의 소국(小國)’으로 변모했다.

미국인 선교사 알렌은 당시 부산을 이렇게 표현했다. ‘부산은 완전히 왜색 도시이다. 도시 변두리로 가지 않고는 조선 사람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일본인은 아주 우아한 백색 건물을 영사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1884년 9월 14일)’


‘해역인문학’ 정립 연구총서

‘동북아 해역과 인문학’ 출간

“개항장 부산은 조선 속 일본”


1894년 청일전쟁을 즈음해 취재 목적으로 조선에 건너온 〈마이니치신문〉 특파원 사쿠라이 군노스케가 쓴 글도 알렌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산의 일본 거류지에는 이같이 호수(戶數)도 많고 인구도 많다. 그래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관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제국총영사관, 경찰서, 동아무역신문사, 우편전신국, 국립공원 등이 있고, 일본우선회사, 오사카상선회사, 제일국립은행, 제백국립은행 등의 지점이 있다.’

이처럼 개항장이었던 부산에는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고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권력 관계가 접합됐다. 개항장의 도시 계획 관념과 형태는 식민 모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인식을 재생산했다.

이가연 부경대 인문한국플러스사업단 HK연구교수는 “부산의 일본 조계 내에는 행정과 상업 시설뿐만 아니라 신사, 사찰, 극장, 유곽 등의 문화 시설도 등장했다”며 “부산은 조선적인, 일본적인, 서구적인 것들이 뒤섞인 ‘섞임의 공간’이자 ‘혼종의 공간’이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이 포함된 이가연 연구교수의 ‘동북아 해역과 개항장’이란 글은 부경대 인문한국플러스사업단(단장 손동주)이 최근 펴낸 해역인문학 연구총서 4 〈동북아 해역과 인문학〉(소명출판)에 실렸다. 이 책의 취지는 바다와 육역(陸域)의 결절 지점이자 동북아 지역 갈등의 현장이기도 한 해역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바다와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해역인문학’을 정립하는 것이다.

책의 1부에는 ‘해역인문학으로 가는 길’(서광덕) ‘해역의 개념과 구성요소’(곽수경) 등 해역 관련 총론 성격의 글이 나온다. 2부에는 ‘동북아 해역과 개항장’(이가연) ‘동북아 해역과 이주’(최민경) ‘동북아 해역과 항로’(김윤미) ‘동북아 해역과 근대 조선산업’(공미희) ‘동북아 해역과 언어기층문화’(양민호) 등 각론 성격의 글이 이어진다. 필자들은 부경대 인문한국플러스사업단 HK연구교수들이다. 김상훈 기자 neato@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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