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자료실

Total 139건 4 페이지
    • 제 목
      근대 동아시아의 전쟁과 바다-『海國圖志』의 서술 시각을 중심으로
    • 저자
      서광덕
    • 발행처
      중국어문학회
    • 발행년
      2022.03.31
    청나라가 해양력 향상을 위한 근대적 정책을 추진하게 된 것은 아편전쟁에서의 패배였다. 아편전쟁이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근대성을 견인한 사건이라면, 동아시아의 근대성은 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편전쟁은 해전이고, 그 이후에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전쟁의 대다수가 海戰이었다. 아편전쟁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영국과의 해전을 통해 세계를 파악하고, 청왕조의 변화를 모색하게 하였다. 이를 대변한 텍스트가 바로 『해국도지』이다. 이 책은 세계지리서라는 성격으로 인해 서구 문화의 수용을 제창하여 중국의 근대화를 추동한 책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魏源이 밝힌 대로 『해국도지』는 군사서이다. 이 글에서는 군사 및 전쟁과 관련된 텍스트가 왜 세계지리서의 성격을 띠고 쓰여졌는지에 대해 탐구하고, 이를 통해 중국 및 동아시아 근대가 전쟁(해전)을 통해 비롯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검토하였다.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한국전쟁기 부산의 중등학교 여학생 교육 고찰-피란학교의 과외활동을 중심으로-
    • 저자
      주현희
    • 발행처
      조선대 인문학연구원
    • 발행년
      2022.02.28.
    본 연구에서는 전시 상황에서 여학생을 대상으로 시행된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정규 교과를 대체하여 운영된 다양한 교육활동을 통해 살펴보고 이러한 여학생 전시교육이 전후 국가 기반 조성과 국가 재건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아울러 살펴보았다.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에는 많은 피란민들이 유입되어 이들을 수용할 학교나 교실이 부족하였고 교육 자료의 수급도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1년 2월 문교부에서 「전시하 교육특별 조치요강」을 공포하였고 피란수도 부산의 교육제도 및 교육과정은 이에 맞춰 긴급하게 전개되었다. 한국전쟁으로 많은 남학생들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학도병으로 징집되었고 이로 인해 피란학교에는 남학생이 줄고 여학생의 수가 더 늘어났다. 이 시기를 전후로 여자 중학교, 여자 고등학교의 운영이 활발해졌으며 여학생의 진학을 위해 여자고등학교도 신설되었다. 이처럼 전시 하에서 군 징용으로 남성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한글을 배우고 기술을 익혀야 했다.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는 전후 재건에 필요한 인적 자원의 육성을 위해 여성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전쟁 중에는 정규 교과를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전시 교육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기의 피란수도 부산의 여학생 교육은 근대 시기에 태동한 여성 교육이 전시하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숙, 발전하였던 시기였다. 전근대적인 여성 교육에서 탈피하여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인식 전환이 근대 여성교육으로 이어졌다. 여학생들은 중등교육을 위해 고등학교, 대학교로 진학한 이후 고급 인력으로 성장하여 전후 국가 재건의 인적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피란수도 부산의 여학생 교육을 되살피고 발굴하는 작업은 교육사적인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일본어 보급 실태 연구: 총독부의 교육정책과 초등교육기관의 학제를 중심으로
    • 저자
      이상원, 주현희
    • 발행처
      한국공공사회학회
    • 발행년
      2022.02.28.
    같은 시기에 일제강점기를 겪은 조선과 대만은 일제의 교육정책과 동화정책의 일환으로써 국어(일본어) 교육을 강요당했고 자국어를 말살 당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또한 초등교육기관의 증가에 비해 중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이는 시세(時勢)와 민도(民度)에 맞춰 보통의 지식과 기능만을 습득시키기 위한 교육억제정책으로 국어(일본어) 보급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식민지 조선과 대만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을 통해 서서히 황국신민으로 양성되어 갔다. 대만의 경우 조선보다 이미 15년 이전부터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게 되었고 조선 역시 1910년 한일 병합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시대이지만 역사와 사회적 상황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일제의 통치 방법과 교육정책에도 차이가 있었다. 그러한 양국에 있어서 교육정책의 목적과 본질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총독부의 교육령과 제도권 교육기관의 학제였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은 총독부의 교육정책과 그 일환으로 행해진 국어(일본어)교육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교육령을 중심으로 제도권 교육기관인초등교육기관의 학제를 비교‧고찰함으로써 일제가 식민지 조선 및 대만의 학령기 아동들에게 교육하고자 했던 정책을 비교·분석하여 국어(일본어)교육의 보급상황과 그 실태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한국전쟁기 유엔군의 원산 상륙작전과 철수작전을 통해 본 해상수송
    • 저자
      김윤미
    • 발행처
      인문사회과학연구소
    • 발행년
      2022.02.28.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유엔은 결성 이후 처음으로 ‘집단안보체제’를 가동하여 참전을 결정했다. 유엔군은 병력과 물자를 군함과 선박에 탑재하여 세계 각지에서 동북아 해역으로 집결시켰다. 한반도 대부분이 북한군의 진영에 들어간 상황에서 전황을 바꿀 수 있는 모든 전략은 해군력이었다. 이글에서는 한국전쟁 동안 유엔군이 전개했던 해상수송과 해양통제 활동에 주목했다. 부산교두보를 확보한 이후, 한국전쟁에서는 큰 해전이 없었고, 일찍이 해상통제권을 확보하여 해군의 활동은 육상작전 지원과 해상수송으로 좁혀졌다. 그런데 유엔 해군은 휴전협정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1953년 7월 27일까지 폭격과 포격 등 해상봉쇄를 전개한 곳이 있었다. 바로 원산이었다. 원산은 일제시기 북한지역의 대표적인 도시였다. 일찍이 개항된 원산에 철도와 항만공사가 시작되어 성진, 청진, 흥남, 나남 등 북한 서쪽지역의 교통, 산업, 경제 중심지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글은 첫째 한국전쟁과 해군의 해상작전의 전개를 살펴보았다. 한반도 해역에서 북한군의 해군력이 일찍이 붕괴한 상황이므로 한반도 전역의 제해권은 유엔 해군이 장악했다. 유엔 해군은 상륙작전, 철수작전, 해군항공 폭격, 소해작전, 해상수송작전, 해상봉쇄작전을 반복하며 전개했다. 둘째 한반도 해역의 작전과 함선 이동을 검토했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은 육상수송과 함께 상륙작전을 통한 지원을 적극 선택했다. 셋째 한국전쟁에서 원산의 지정학적 역할과 군사적 대응을 고찰했다. 한국전쟁에서 수송과 전투를 고려한 해상작전이 전개된 곳은 부산과 인천, 원산과 진남포였다. 군사전략적으로 원산과 진남포는 ‘한반도의 좁은 허리 부분’이었다.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Perceptions and Experiences of Marine Education Culture in t…
    • 저자
      YANG, Minho / KIM Joonhwan
    • 발행처
      "차세대컨버전스 정보서비스학회"
    • 발행년
      2022.02.28.
    This study compared the cases of Korea and Japan to examine the effect of the maritime education culture of maritime museums on the participation intention according to experiential factors. This study conducted an online survey on 280 people who visited the Korea National Maritime Museum in Busan, Korea, and the Kobe Maritime Museum in Japan. The survey showed that three of the five experiential factors proposed in this study (emotional, sensory, and relational) had a positive relationship with the respondents' intention to participate in both Korea and Japan. Moreover, the emotional factor had the most significant influence among the experiential factors affecting the intention to participate. The findings implied that maritime museums should improve not only their operational method of focusing on hosting information-oriented exhibitions but their emotional relationship with the viewers. This study provided theoretical and practical implications by conducting an empirical analysis of the effect of experiential factors on the intent to participate in maritime education culture through maritime museums. The findings of this study could also be applied to improve the quality of visitor experience and provide policy feedback.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해양관광도시의 도로표지 언어경관 연구:부산과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 저자
      양민호
    • 발행처
      융복합지식학회
    • 발행년
      2021.12.31.
    최근 언어경관 측면에서 도로표지의 실태에 대해 주목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는 미흡한 실정이다. 본 연구는 해양관광 도시의 도로표지 현황과 행태를 조사하고 표기의 경향이나 다언어 표기의 패턴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부산과 요코하마의 도로표지 이용자 280명을 대상으로, 개인적인 특성 관점에서 심미감과 실재감이 정보유용성 및 이용자만족에 미치는 영향을 구조방정식모형(SEM)을 사용하여 실증적으로 검증하였다. 분석 결과, 부산과 요코하마의 이용자 모두 심미감과 실재감이 정보유용성에 대하여 유의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정보유용성은 이용자만족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유의한 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심미감보다 실재감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결과는 실무자가 언어경관(도로표지)을 설계하고 실제로 적용하는데 있어서 인지적 기제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언어경관(도로표지)이 효과적으로 실행되었는지 판단하기 위한 준거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새로운 접근법으로 도로표지의 메커니즘을 통한 관광도시의 전략 수립 및 운영에 실제로 활용이 가능한 언어경관의 관리 방안에 기여를 할 것이다.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일본패전 후 재만주 일본피난민의 실상과 북한유입 및 남하탈출
    • 저자
      공미희
    • 발행처
      아시아문화학술원
    • 발행년
      2021.12.31.
    이 글의 연구목적은 일본패전 후 만주에 진입한 3군(소련군, 중공군, 국민정부군)의 정책에 따른 재만주 일본피난민들의 실상에 대해서 살펴보고 또한 만주피난민이 가장 많이 유입된 평양과 함흥을 중심으로 이들이 남하로 탈출하기까지의 실상과 특징에 대해서 고찰한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패전 후 재조선일본인의 귀환체험을 기록한 사료와 시의성(時宜性)의 신문을 활용해서 분석했다. 그 결과 재만주 일본피난민은 3군의 주택 강제 접수, 소지금과 물건 약탈, 부녀자 폭행 및 강제노동 사역 등으로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평양과 함흥에 유입된 만주피난민들도 의식주생활의 악화로, 개인 및 소규모적인 탈출을 시도했으나 대부분 역송되었고 차츰 소련군 간부들의 묵인으로 집단탈출도 개시되었다. 특히 함흥에서의 이소가야 스에지의 귀환활동이 돋보였고 한층 1946년 12월 공식적인 귀환협정이 맺어졌을 때는 재주일본인의 97%가 이미 탈출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본고는 일본패전 후 동북아에서 일본인이 3군 및 조선인과의 갈등과 인구이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데 의의가 있으며 평양과 함흥 이외의 도시에 유입된 만주피난민의 귀환특징에 관련된 후속 연구가 계속 되기를 기대한다.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근대 동아시아의 ‘해양’ 관련 논의에 대한 고찰 -인식,학문,담론을 중심으로"
    • 저자
      서광덕
    • 발행처
      중앙대학교 외국학연구소
    • 발행년
      2021.12.31.
    It is after modern times that the marines have been collectively noticed at the national level, and the world has been connected through the expansion of marine transportation, and human and material cultural exchanges have been developed along the way.,This drove globalization, and this flow also included the East Asian region.,The East Asian region, which accepted modern civilization through the ocean, relativized the sea, accepted modern knowledge through the sea and converted it into a national state.,The national states have driven the territorialization of the sea, which has led to the conflict and confrontation of the sea, and in this regard, returning the sea to the place of reconciliation and peace is linked to postmodernism.,In this article, the recognition surrounding the sea, the study formed by the sea, and the area (sea area) theory formed around the sea were summarized based on the existing research.,Based on this theorem, I would like to see the possibility of a new academic field called the humanities of the sea.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해방직후 북한거주 일본인의 실상과 갈등 및 귀환 연구– 평양을 중심으로 –
    • 저자
      공미희
    • 발행처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
    • 발행년
      2021.12.30.
    This study considered the actual conflict and the official repatriation process and characteristics of Japanese residents of North Korea, especially Pyongyang, after liberation to escape to South Korea, an unofficial repatriation process. Since August 10, the Soviet military government has been stationed in North Korea to ban Japanese people from moving to outside areas, and has sent a number of young men to the Soviet mainland and Siberia's maritime provinces for various services. The Japanese were looking forward to returning home in the opposite of the luxurious life they had before the defeat. However, they had no idea of the timing of their repatriation and had to live as an escape at all times by Soviet tyranny. In addition, all savings such as banks and post offices were received and unavailable immediately after the end of the war, and there was a limit to enduring the severe cold due to high prices. The Japanese living in Pyongyang tried to stow away and escape from the South by individual or small scale, especially because Pyongyang was concentrated in various governments, including Soviet occupation agencies, and there was a stronger crackdown than other regions. The massive escape of the Japanese began at the end of February 1946, and the conflict of hardship in the escape process was beyond description, and there were also many casualties. In particular, the Japanese, who had been moved from Chueul to Jinnampo and waited for their repatriation ship, have taken many lives due to the outbreak of malignant measles and typhoid fever. Shortly after the mass escape was almost completed, the official repatriation of the Japanese was announced and an agreement was reached on their repatriation. The first official repatriation ship, Yeongpunghwan, entered Wonsan in December 1946, and it was discovered that the Japanese in Wonsan, Munpyeong, and Heungnam took the repatriation ship, and after that, the second ship left the port in March 1947, July, November 1948.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시데하라『朝鮮教育論』(1919)에 나타나는 식민교육정책 고찰 - 동화교육을 중심으로
    • 저자
      이상원,주현희
    • 발행처
      대한일어일문학회
    • 발행년
      2021.11.30.
    일제가 통감부시기부터 한국인에게 강요한 제국주의의 식민교육정책은 일제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이식하여 일제에 동화하도록 교육하는 것이자 지배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서는 궁극적으로 식민지 조선인의 정체성을 삭제하여 일제의 황국신민으로 기르기 위함이었다. 통감부시기 일제의 문부성의 명령으로 외국인 교사의 신분으로 도한(渡韓), 외국인 교사로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한국 학부의 ‘학정참여관’으로 활동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일제의 식민지교육정책의 기반을 만든 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1870-1953)이다. 학정참여관으로 근무하며 작성한 「한국교육개량안」은 ‘모범교육’으로 구현되며그의 퇴임 후,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의 기초가 되며, 그가 저술한 한국사 및 식민지 조선에 대한교육정책에 관련 된 다수의 편찬서는 일제가 강요한 식민교육정책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본 논문은 이러한 일제의 식민교육정책의 기반을 만든 시데하라의 행적과 동향을 분석하고, 그가 일본으로 귀국 후 식민지 교육의 이론가로 활동하면서 저술한 『조선교육론』(1919)를 중심으로 그가 가진 조선인 동화교육에 관한 견해와 방법, 그리고 신념에 초점을 맞추어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이식하고 창출하고자 했던 내용과 양상, 아울러 조선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고찰을 목적으로 한다.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오키나와 전투와 방언 논쟁에 관한 연구-차별과 갈등의 관점에서-
    • 저자
      양민호
    • 발행처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 발행년
      2021.11.30.
    본 연구는 오키나와 전투와 방언 논쟁을 통해 언어에 대한 차별 의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밝히기 위해 방언논쟁이 시작된 계기와오키나와 전투에 얽힌 방언 차별문제에 대해 파악하고자 하였다. 현대에는 오키나와 방언이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하나의 표현 코드로 성장하였다. 그렇지만 오키나와 전투 시기에는 오키나와 방언은 사라져야할 언어이며, 국민국가 통합을 저해하는 하나의 걸림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많은불편과 차별을 겪는 오키나와 주민에게 있어서 방언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불평등을 감수하라는 뜻이다. 표준어 장려정책을 펼치면서 국어는 국민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입받아온 교육 때문에 타자(他者)로부터가 아닌 오키나와 현민스스로가 오키나와 방언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쟁을 통해 하나의 국가를 꿈꾸어왔던 정부에게 오키나와 방언과 같은 지역어는불필요한 언어인 것이고, 갈등과 차별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오키나와 전투와 방언 논쟁 연구를 통하여 오키나와 방언 화자의 정체성 형성에 외부 요소와 상황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냉전의 바다를 건넌다는 것: 한인‘밀항자’석방 탄원서에 주목하여
    • 저자
      최민경
    • 발행처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 발행년
      2021.11.30.
    1950년대 들어 한인의 ‘밀항’은 일본사회에 공산주의를 침투시킬 가능성이있는 이동으로서, 이전의 전염병, 범죄와는 차원이 다른 위험 요인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이렇게 한인의 ‘밀항’이 냉전과 교차하는 양상을 한인 ‘밀항자’ 석방 탄원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분석 결과, ‘밀항자’ 석방을 위하여 가족, 친인척 이외에 반공산주의계 민족단체의 관계자가 탄원인으로 등장하여 ‘밀항자’가 위험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였음을알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증명’이 언제나 유효했던 것은 아니며, 경찰 조사등을 바탕으로 GHQ/SCAP에 의한 ‘해석’의 과정을 거쳤다. 각종 이력을 근거 삼아 ‘밀항자’는 물론 탄원인의 ‘생각’을 공산주의와의 관련성이라는 측면에서‘해석’하였으며, 이는 자의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궁극적으로 ‘밀항자’의석방 여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한인 ‘밀항자’ 석방 탄원서는 해방 이후한인 도일이 냉전이라는 구조적 배경에 의해 어떻게 제약을 받아 ‘불법’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정치사회적 맥락 아래에서 ‘불법’이 ‘예외’로서 인정되는 국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대만해협위기와 심리전 - 냉전시기 대만과 중국의 삐라를 중심으로
    • 저자
      이가영
    • 발행처
      인문사회과학연구소
    • 발행년
      2021.11.30
    본 연구는 냉전시기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대만이 살포한 삐라를 중심으로, 중국과 대만 간의 심리전을 분석한다. 주지하다시피, 대만해협은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본거지를 옮긴 이후부터 지금까지 냉전과 열전이 혼재해있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대만의 ‘본토 수복’과 중국의 ‘대만 해방’이라는 기치아래 발생한 고령두 전투, 제1차 대만해협위기 및 제2차 대만해협위기 등은 열전과 냉전이 교차된 갈등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제2차 대만해협위기 이후 양측의 갈등은 대만해협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국지전이자, 양측의 육·해·공군이 합동으로 전개한 전면전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또한 상대를 향해 대규모의 포탄을 발사한 포격전이자 다양한 형태의 선무방송, 선전보도, 삐라살포가 이루어진 심리전의 성격도 나타난다. 양측은 자신의 이념과 사상을 선전하고 상대의 전의 상실과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전방위적인 심리전을 전개하였다. 그중 삐라전은 다양한 운송수단과 제작기법 및 기획 전략의 발전으로 인해 보다 많은 적들에게 노출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심리전의 방식으로 인식되어왔다. 삐라는 넓은 지역에 광범위한 심리전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이자, 신문·잡지·라디오·방송 등 제도적 매체를 접할 수 없는 일반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비제도적 매체로서 뛰어난 접근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대만해협에서 진행된 중국과 대만의 삐라전을 분석하여, 양측의 전투 목적과 운용 전략을 분석한다. 두 번째는 문헌과 자료의 분석을 통해, 중국과 대만이 운용한 다양한 삐라 살포 방식을 정리하고, 각각의 살포 방식이 지닌 특징을 도출해낸다. 세 번째는 중국과 대만의 삐라에 담긴 주제의 전형성을 추출하고 이를 분류함으로써, 각 삐라의 제작목적과 삐라 속에 담긴 논리를 추적한다.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원양어업 선원들의 경험을 통해 본 해역세계
    • 저자
      김윤미
    • 발행처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 발행년
      2021.10.30.
    해역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선원들은 그들의 시선으로 바다를 보았다. 선원으로서 개인사는 특수한 경험이지만, 이것이 모여서 공동체의 기억이 되고, 또 사회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다. 선원들의 활동이 국가 경제와 연결되어 장려된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이 글은 한국현대사 속에 원양어업을 역사화 시켜보려는 시도로, 선원 개인의 삶을 거시적 변화 속에서 읽어보려고 한다. 원양어업 선원들이 경험한 바다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을 해역세계라고 명명하고 인류사회가 형성한 또 하나의 삶의 영역으로 구분하려고 한다. 선원들은 한국 내 정책, 국제법, 어업과 관련한 상대 국가의 정치사회적 변동을 동시에 적용받았다. 선원들은 국제사회의 변화를 최전선에서 대면하고, 해역세계를 이동하면서 거점을 마련했다. 북태평양, 남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남빙양 어장에 어업기지를 건설하고 이를 거점으로 네트워크를 만들어갔다. 원양어선에 승선한 선원들의 세계관과 인식은 바다의 현장에서 형성되었다. 출항한 배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공동체였고, 또 다른 사회를 만들어갔다.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 제 목
      부산의 산동네와 해역 이주: 근현대의 연속성에 주목하여
    • 저자
      최민경
    • 발행처
      인문사회과학연구소
    • 발행년
      2021.08.31.
    본 연구에서는 부산 산동네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근현대의 연속성에 주목하여 살펴보았다. 고찰의 결과, 부산의 산동네는 크게 세 시기에 걸쳐 등장, 전개, 확대되어 왔으며, 모든 시기에서 해역 이주 현상과 뒤얽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초반, 1940년대 후반, 그리고 1950년대 초반의 급격한 인구의 사회적 증가가 부산 산동네의 역사적 형성의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일제강점기 부산역과 부산항을 중심으로, 도일을 희망하는 노동자의 적체로 인해 등장한 산동네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귀환동포와 피난민의 대규모 유입을 통해 부산 내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부산의 산동네를 근현대 전반에 걸쳐 장기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바다를 통하여 여러 가지 의미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동과 맞물리는 형태로 역동적인 형성 과정을 거쳐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본 연구의 고찰은 일반적으로 한국전쟁 피난민 유입에 부산 산동네의 기원을 찾는 기존 연구에 해역인문학적 시각을 더하여 부산 도시 형성의 역사를 살펴보는 작업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즉, 한국전쟁 피난민 유입은 부산의 산동네가 오늘의 모습에 이르는 가장 극적인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지만, 이는 부산이 근대와 현대에 걸쳐 경험한 바다를 통한 고유의 인구 이동과 증가의 역사를 바탕으로 중층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해 부산이라는 지역, ‘로컬’은 해역, 구체적으로는 동북아 해역을 가로지르는 인문 네트워크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초국가성/국가성을 내포하며 전개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으며 향후 국제 비교 연구를 통해 이론적, 사례적 함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게시물은 HK+사업단님에 의해 2022-06-14 15:47:07 학술논문자료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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