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자료실

Total 139건 2 페이지
    • 제 목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일본어 교육의 통사적 연구
    • 저자
      이상원
    • 발행처
      대한일어일문학회/일어일문학 (JALALIKA)
    • 발행년
      2023, vol., no.99, pp. 26-42 (17 pages)
    본 논문은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시대에 걸친 일본어교육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행해진 일본어교육의 양상을 살펴보고, 해방 이후 왜색일소, 일본문화와 일본어 잔재가철저히 배제되는 역사적·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생겨난 일본어교육의 필요성 대두와 대중들의 인식에 대하여정치‧사회적 문맥과 상호작용에 입각하여 통사적으로 살펴보았다. 한국은 과거 35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아 ‘국어’로서의 일본어를 강요당해 온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한일합방 이전부터 일제의 통감부는‘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사립 교육기관을 강제적으로 탄압하였고, 조선총독부는 1911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식민지 조선의 학령기 아동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도권 교육기관의 조선어 과목은 수의(随意)과목으로 전락하였고 일본어 과목명은 국어로 바뀌었고, ‘학술 강습회’와 같은사회적 교육기관은 일본의 간섭과 탄압을 통해 일본어 전문 교육기관으로 변질되어 갔다. 일본어교육은 일제와 친일단체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고 일본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지역에서는 일본어 학습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해방 이후 1960년까지 철저한 반공, 반일 정책을 취했고 학교 등의 교육시설에서는 일본어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공백기(1945년-1960년)로 볼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왜색 문화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반일 및배일 관념이 매우 심화된 시기였다.1965년 한일기본조약 협정 이후, 한일 간 활발한 교류와 함께 문교부의 사설 일본어 강습소의 허가, 대학에서의 일본어과 설치 승인 등, 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일본어교육이 재보급되는 시기(1961년-1971년)로 접어들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협정 이후 양국의 경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일본 기업이 저렴한 한국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한국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면서 무역 교류가 증대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어 수요는 증가했고 일본어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시기였다. 1972년 일본어 강습소가 허가되고 1973년부터 일본어가 고등학교제2외국어로 지정된다. 재차 일본어교육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어려웠지만 그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고 박정희 정권은 나라발전을 위해 필요한 언어임을 강조하였고 ‘국민교육헌장’과 ‘국적있는교육’을 제창하면서 일본어교육을 정당화했다. 이후 일본관련 학술단체의 설립과 대학에서의 일본어 관련 학과의 개설 등으로일본어교육이 정착하면서 도약기(1972년-1979년)를 맞이하게 된다.
    • 제 목
      근세 세계화(archaic globalisation)의 맥락에서 본 조선시대사
    • 저자
      신상원
    • 발행처
      부경역사연구소/지역과 역사
    • 발행년
      2023, vol., no.53, pp. 145-197 (53 pages)
    유럽 내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는 한국학 (Korean Studies)이라고 하는 분과 아래에서 행해지고 있다. 한국학은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역사 등 종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지역학의 하나이다. 당연히 이런 종합적인 이해를 위한 노력으로 인해 다양한 주제와 시기를 넘나들므로, 한국학이 다루는 범위는 아주 넓다. 당대 한국과 역사 속의 한국,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한국까지 포함하는 학문 분야인 것이다. 한국학의 조선시대사 연구는 이런 넓은 범위 안의 한 분과이다. 유럽 내에서 한국의 관심 증가에 따라 이런 한국학과 그 분과인 조선시대사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전근대시기 보다는 근대 그리고 현대시기에 집중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전근대시기 연구에서는, 조선후기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며, 고대시기나 고려시기는, 원래부터 연구가 많지 않은 분야인 전근대 시기에서도 더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내 조선시대사 연구는 의미있는 연구 결과들을 내놓고 있다. 이들은 영미권의 세계화 연구 경향에 따라 연구되어, 세계사와 동아시아사적 차원에서 조선시대사를 보는 경향이 크다. 본 논문은 최근의 이런 유럽 내 조선시대사 연구들을 통해, 세계화의 맥락에서의 한국사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 제 목
      해역의 시각에서 다시 보는 세계화 그리고 동북아해역
    • 저자
      서광덕
    • 발행처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해항도시문화교섭학 (CISSPC)
    • 발행년
      2023, vol.29, no.29, 통권 29호 pp. 91-120 (30 pages)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시작된 ‘세계화’는 원래 세계경제가 실시간에 하나의 단위로 작동하는 단일체제로 통합되는 과정으로,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시장과 노동을 신자유주의 방식으로 재편하면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한 전세계의 대응이 다양하게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세계화’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주 먼 곳까지 영향을 미치는 지구적인 규모의 상호의존성이 강화되는 현상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게다가 정보통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인터넷에서 개인과 세계가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고, 이러한 정보통신이 발달이 지금까지 개인과 집단이 영향을 주고받는 최대 단위였던 ‘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전지구적인 세계화를 촉진하였다. 이 글은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갖는 ‘세계화’가 지역 특히 동북아해역에서 어떻게 현상했는지, 또 동북아해역을 과연 로컬로서 정의할 수 있는지를 탐문해보았다. 많은 학문분야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진 세계화와 관련한 연구 성과를 해역(의 시각)에 맞추어 재해석하고, 또 동북아해역 곧 리저널리즘과 연계된 해역 그래서 ‘동아지중해’ 등과 같은 환해양권역 개념의 등장과도 연결해서 살펴보았다. 이와 더불어 최근 동북아 각 해역에서 전개된 해역도시의 확장 그리고 해역도시들간의 네트워크 형성으로 나타난 메가지역 구상과 추진 등이 지닌 의미를 분석해보았다. 특히 최근 부울경 메가시티 구상과 가덕도 신공항 건설 등의 부산 사례를 중심으로 해역에서 도시의 확장과 어촌의 소멸이란 문제에 대해 검토하고, 이러한 사례들이 동북아지역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 세계화가 해역에서 드러나는 특수성을 밝히고, 그 결과 동북아해역도 로컬로서 규정할 수 있다면, 동북아해역에서 글로컬리제이션 또는 로컬의 국제화는 결국 바다를 끼고 있는 해역간의 네트워크에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 제 목
      일제식민지기 고토히라신사[金刀比羅神社]의 건립양상과 해양신앙
    • 저자
      문혜진
    • 발행처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해항도시문화교섭학 (CISSPC)
    • 발행년
      2023, vol.29, no.29, 통권 29호 pp. 281-320 (40 pages)
    「조일수호조규」 이후 한일병합 이전까지 조선에는 총 10개의 항구가 개항되었다. 이들 개항지에서의 일본 어민들의 통어가 합법화되기 시작하며 자유이주어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03년 조선해수산조합이 창립되면서 일본 각 지방에서 지원을 받는 보조이주어촌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개항장에 조성된 이주어촌이나 보조이주어촌에서 고토히라신사가 창건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토히라신은 일본의 어촌에서 해양신으로 스미요시, 에비스와 함께 가장 많이 모셔지는 신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아마테라스가 황조신으로 일본 민족의 우월성 혹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모셔졌다면 고토히라는 개항장으로의 일본 어민의 진출과 해양신앙을 나타낸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1909~1912)에 따르면, 구한말 조선의 개항장 및 보조이주어촌에 고토히라신를 비롯한 해양신사는 8사(31%)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해방 전까지 『통계연보』에 기재된 고토히라신사는 총 6사(0.6%)에 불과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구한말 개항장을 비롯한 보조이주어촌에 창건된 고토히라신사의 건립 양상과 변모 양상을 살펴본 후 식민지 조선에서 고토히라신사의 수가 적은 이유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식민지 조선의 고토히라신사에 있어서 해양신앙을 검토하여 식민지 이주어촌에서 고토히라신사가 제일 먼저 창건되는 배경을 파악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개항 이후 조선의 연근해로 이주한 일본인 이주 어민과 해양신앙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본 연구는 개항 도시에 창건된 거류민봉제신사의 해양신앙을 통해 식민지 신사의 다원성과 지역적 특성을 잘 보여줄 것으로 생각된다.
    • 제 목
      군항도시 사세보(佐世保)의 관광도시 전환 과정의 설계와 실천 : 하우스텐보스(Huis Ten Bosch) 설…
    • 저자
      이상원
    • 발행처
      한국정치사회연구소/한국과 국제사회 (코발소)
    • 발행년
      2023, vol.7, no.5, 통권 29호 pp. 863-885 (23 pages)
    이 연구는 일본 규슈 북쪽 서단(西端)에 위치한 작은 도시지만, 제1,2차 세계대전에서 구(舊)일본 해군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맡은 군항도시 사세보(佐世保)가 관광도시로 전환되는 그 과정의 설계와 실천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83년 개장한 나가사키(長崎) ‘오란다무라(Holland Village)’는 지역경제에 많은 파급효과를 가져왔고, 1992년 개장한 ‘하우스텐보스(Huis Ten Bosch)’는 관광도시로의 전환에 있어 ‘결정체’와 같은 역할을 했다. 오랜 기간 군항도시의 역할이 지속된 사세보는 전전기(戦前期)와 전후기(戦後期)를 거치며 어두운 전쟁의 체험과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사세보 시민들이 염원하던 ‘평화산업항만도시’로의 전환에 있어 결정체 역할을 한 ‘하우스텐보스’의 개장은 마치 어두운 전쟁의 역사의 흔적을 지우듯 나가사키의 역사와 문화라는 옷을 입혀 그 부지위에 자리 잡았다. 하우스텐보스가 조성된 부지는 전전기에는 해군병교 하리오(針尾)분교가, 전후기에는 인양자들의 숙소이자 인양 원호국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었다. 이처럼 사세보의 어두운 역사의 땅 위에 하우스텐보스가 지어지며 군항도시에서 관광도시로 전환된 과정을 흥미롭게 살펴보고자 한다.
    • 제 목
      가덕도 어촌의 근현대 공유재의 변천사 -가덕도 마을어장의 식민지 자원수탈과 부산신항 영향의 사례연구-
    • 저자
      문혜진
    • 발행처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도서문화』 (JIC)
    • 발행년
      2023, vol., no.61, pp. 71-97 (27 pages)
    가덕도는 조선시대부터 대구어장이 성행하였으며, 1904년에는 의친왕이 가덕도 일대의 대구어장을 사점화하여 1906년 가시이 겐타로[香推源太郞]에게 20년간 대여하였다. 가시이는 1908년 「한국어업법」에 근거하여 71개소 어장에 대한 면허를 받아, 조선인 어민에게 고율의 대부료를 받아 가덕도의 어장을 수탈하였다. 또한 새 어업법에 대한 무지로 조선인 관리에 의해서 혹은 가덕도 어민 간에도 어업조합의 헤게모니에 따라 점유와 착취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마을 공동어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어업조합원 간에, 혹은 눌차동과 동선동 마을 간에 분쟁이 발생하였지만 1962년 「수협법」의 공포로 지선어장의 경계가 정해지면서 일단락되었다. 즉, 「수협법」의 공포로 어촌별 마을어장은 커뮤니티(community)의 공유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1997년 부산신항이 건설되면서, 가덕도 어민들은 삶의 터전인 바다를 부산신항 부지, 즉 공공개발 부지로 내어주면서 마을어장의 어업 면허권과 어선어업을 할 수 있는 배 면허권이 소멸되면서 생존권을 박탈당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가덕도 마을어장의 변천사를 살펴보면서, 공공개발에 밀려 마을어장을 공공(public)에 환원하면서 발생하는 어촌 공유재의 소유권 문제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 제 목
      가덕도 일본군 군사시설 사적지의 다크 투어리즘 가치 재고
    • 저자
      이상원
    • 발행처
      인문사회 21/인문사회 21 (인문사회 21)
    • 발행년
      2023, vol.14, no.3, 통권 58호 pp. 3029-3042 (14 pages)
    가덕도 일본군 군사시설 사적지의 다크 투어리즘 가치 재고이 상 원** 연구 목적: 이 연구의 목적은 가덕도 일본군 군사시설 사적지를 ‘다크헤리티지’의 현장이자 ‘다크투어리즘’의 장소로 자리매김을 목적으로 하고 그 가치를 재고하고자 한다. 연구 방법: 다크투어리즘의 이론적 고찰과 현장 답사를 병행한 사료분석, 현존하는 군사시설 조사를 통해 지속가능한 다크투어리즘 사적지로서의 가치를 재고한다. 연구 내용: 부산은 도심 곳곳에 다크투어리즘의 관광자원이 산재해 있다. 최근 대두되는 가덕도 신공항 건설과 함께 가덕도 내 문화유산 등에 관심이 쏠린다. 정부는 2030년 엑스포 유치와 연계하여 속도가 붙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은 5년 이상 앞당겨져 2029년 12월에 개항할 계획을 밝히는데, 가덕도 내의 일본군 군사시설 사적지를 다크헤리티지의 현장이자 다크투어리즘의 장소로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가치를 재고하고자 한다. 결론 및 제언: 가덕도 신공항 건설은 불가역적 국책사업이지만 가덕도 일본군 군사시설 사적지에 대하여 보존 가치를 진단하여 철거 대상이 아닌 보존의 장소자산으로 인식하여 미래 세대의 역사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형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에 다크투어리즘 사적지로서의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핵심어: 가덕도, 다크투어리즘, 다크헤리티지, 사적지, 신공항 건설
    • 제 목
      군항도시 사세보(佐世保)의 유흥공간 변천
    • 저자
      이상원
    • 발행처
      동북아시아문화학회/동북아 문화연구
    • 발행년
      2023, vol.1, no.75, pp. 25-37 (13 pages)
    As for the entertainment space in Sasebo, from 1889, when the old headquarters was established, during the pre-war period, brothels and kashizashiki (貸座敷) were created. With the Katsutomi Yukaku and Hanazono Yukoku as the center, Aiura and Haiki Yukura were also established. Around 1937, it reached its peak of prosperity, and there were more than 1,000 prostitutes in only two brothel districts, Katsutomi and Hanazono. However, the Sino-Japanese War began, and the influence of the war could not be avoided even among prostitutes. Some were mobilized to factories for military production or converted to farming to make a living. Due to the Sasebo air raid on June 29, 1945, at the end of the Pacific War, the Katsutomi and Hanazono brothel areas were burnt down, districts of which lost their function. As the Allied Forces entered Sasebo after the defeat on August 15, 1945, the Sasebo City Hall and City Police Station gathered the owners and prostitutes of Katsutomi and Hanazono, which had been destroyed by the war, and instructed to set up brothels for the military. In the end, it was installed as a space dedicated to prostitution for soldiers and civilian employees under the name of ‘Special Teahouse Street’. The Korean War broke out in 1950, and the Allied Forces Command was established in Sasebo. Sasebo, which became a base for sending troops to Korea and supplying military supplies, was overflowing with soldiers crossing to the battlefield and returning from vacations from the battlefield, and foreigner bars also prospered together. On July 27, 1953, an armistice agreement was signed in the Korean War, and Sasebo's entertainment district again flourished due to the returning soldiers through Sasebo Port. However, due to the closure of the US military base, Aiura Camp, and the Japanese government's deflationary policy, sekikashi for foreigners also decreases. In March 1950, the entertainment space, which was divided into foreigners and Japanese by the Relocation Committee, was organized as one in Katsutomi-cho, Goten-cho and Gion-cho. The reorganized Katsutomi/Hanazono Yukaku did not last again, and in March before the Prostitution Prevention Act took effect on April 1, 1958, the sekikashi business was closed and changed to an inn. In this way, we examined how the entertainment space of Sasebo has changed since 1889, when the old headquarters was established, through the prewar and postwar periods.
    • 제 목
      부산 가덕도 숭어들이 어업과 해양신앙 – 대항어촌계 숭어들이 마을어장의 소멸과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대한 대…
    • 저자
      문혜진
    • 발행처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로컬리티 인문학
    • 발행년
      2023, vol., no.29, pp. 7-35 (29 pages)
    대항마을 숭어들이는 여섯 척의 배가 바닷속에 그물을 깔아 놓고 기다리다가 숭어가 지나가면 일제히 그물을 끌어올려 잡는 전통어업 육소장망이다. 이러한 전통어법은 선원수급의 문제로 2012년 거제도에서 기계식 양망기를 도입하면서 반기계식 육소장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육소장망이 반기계식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전통 어법의 방식은 유지되기 때문에, 거제시에는 반기계식 육소장망의 국가중요어업유산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부산시 유일의 대항마을 숭어들이는 초대 어로장 김국진 이래 170년을 이어오고 있다. 숭어가 들어오는지 살펴보는 망대를 지키는 어로장이 되려면 물 때, 물색, 바람, 숭어 특성, 오는 방향, 숭어무리의 형태에 따른 그물 조이는 방식 등 숭어들이 특유의 어법에 대한 전통지식을 배워야 한다. 지금도 어로장의 이러한 전통지식에 근거해서 숭어를 잡고 있으며, 대항동의 128명의 어촌계는 봄철 숭어들이로 연간 4~5억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숭어들이의 수장 어로장은 사후 제당의 위패로 모시는 신이 되며 숭어들이 고사의 해양신앙이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2020년 가덕도 대항동이 신공항 부지로 선정되면서 170년을 이어져 온 대항마을 숭어들이 전승이 단절되게 생겼다. 이에 본고에서는 대항마을 숭어들이와 고사에 대한 현지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가덕도 숭어들이 문화의 변천사를 재구성하여 어업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나서 가덕도 신공항 건설로 인한 어촌마을의 소멸과 어부의 삶의 변화를 대항동 어부들의 인터뷰를 통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 제 목
      Robert Morrison의 A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 편찬과동서 …
    • 저자
      엄지
    • 발행처
      인문사회 21/인문사회 21 (인문사회 21)
    • 발행년
      2023, vol.14, no.1, 통권 56호 pp. 295-310 (16 pages)
    Robert Morrison의 A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 편찬과동서 해역교류의 발전엄 지** 연구 목적: 이 연구는 Robert Morrison이 편찬한 A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의 연구 가치와 중요성을 제고하고, 근대 이중언어 자료의 발굴과 연구 필요성을 알리는 데 있다. 연구 방법: 전통적 문헌 분석의 방식을 따라 위 사전의 음운체계, 어휘수록 방식과 내용 구성 특징을 면밀히 살펴보고, 동시에 선행연구와 당시 문헌들의 기록을 함께 비교, 고찰하였다. 연구 내용: Morrison은 위 사전에서 현실 남경음(南京音)을 체계적으로 반영하고, 어휘에 관한 다양한 용례와 설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선교 목적을 넘어 영중(英中) 간의 상호 이해를 중시하고, 독자 중심의 실용성과 대중성을 추구하였다. 결론 및 제언: 위 사전은 근대 동서 해역교류의 매개체이자 문화 상대주의적 시각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상호 협력적인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핵심어: Robert Morrison, A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 중국어, 서양 선교사, 동서교류 □ 접수일: 2023년 1월 5일, 수정일: 2023년 1월 22일, 게재확정일: 2023년 2월 20일* 이 논문은 2017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7S1A6A3A01079869). **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HK연구교수(Professor, Pukyong National Univ., Email:
    • 제 목
      일제강점기 해양소년단과 조직화되는 소국민-조선공민교육회와 잡지『해국소년』을 중심으로-
    • 저자
      임상민
    • 발행처
      한국일본문화학회/日本文化學報
    • 발행년
      2023, vol., no.96, pp. 269-290 (22 pages)
    本稿では1944年に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朝鮮で発行された日本語雑誌『海国少年』を中心に、大日本海洋少年団朝鮮本部の結成過程と朝鮮人児童を総力戦に備えた予備軍として組織化していく同時代的意味について考察することを目的とした。特に1940年代に植民地朝鮮で発行された日本語雑誌と同誌を発行した朝鮮公民教育会、そして朝鮮総督府と朝鮮軍(特に朝鮮に駐屯していた日本海軍)をめぐる相互交渉的な関係性について究明することを試みた。 その結果、『海国少年』は朝鮮総督府当局の宣撫工作の一つであり、当時の戦時状況が悪化すればするほど、海軍に優秀な人材を送るために編集された雑誌であった。特に、徴兵制度と大日本帝国のために軍隊に入隊することは「義務」ではなく「権利」であると強調しながら、植民地朝鮮人の貧困と差別的な階層性を隠蔽させ、「天皇の嫡子」としての帝国日本の小国民意識を移植させていった。 現在、『海国少年』を読むということは平凡な朝鮮人少年である小国民を総力戦に備えて予備兵として組織化していくプロセスを究明することであり、それは単に日本内地と朝鮮外地、植民地と被植民地、朝鮮人と日本人のように二分法的に捉えるのではなく、当時の朝鮮総督府と日本軍、学校、そして出版社を含む新聞雑誌メディアがそれぞれどのような思惑の下で一体化していったのかを解明することに他ならないのである。
    • 제 목
      기지국가 일본의 對 베트남 원조외교
    • 저자
      이상원
    • 발행처
      지역사회학회/지역사회학(Korean Regional Sociology) (KRS)
    • 발행년
      2022, vol.23, no.3, 통권 53호 pp. 183-198 (16 pages)
    전후 일본은 헌법 제2장 제9조(곽대기, 2007)) 일본국 헌법 제2장 전쟁의 포기, 제9조 ①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 앞 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을 유지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에 전쟁포기를 규정함으로써 ‘평화국가’ 이념 성립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기간 중 미국의 전쟁수행을 위한 후방기지의 역할을 수행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한다. 즉, ‘평화국가’의 개념이 미국형 외교에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임한 ‘기지국가’라는 현실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1951년 대일강화조약 및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되었고 1952년 두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독립국으로 주권을 회복했지만, 미국의 목적은 일본의 재군비보다 우선된 전략적 위치의 확보를 위함이었고, 미일안보조약의 목적은 미군의 주둔과 일본기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보조약에는 일본의 기지 제공에 상응하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방위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1957년 기시내각의 요구에 따라 협상이 이루어졌다. 1960년 새로운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되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미국의 일본에 대한 방위의무가 명시되었고, 극동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일본은 미국에게 기지를 제공한다는 권리의무관계가 확립되었다(李昌偉, 2008: 141-142). 일본은 한국 전쟁 기간 중 연합군의 기지역할을 수행하였고, 이른바 ‘조선특수(特需)’를 통해 당시 일본 수출량의 63%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이에 비해 베트남 전쟁은 직‧간접적 영향을 포함하더라도 일본 수출량의 7~8%에 지나지 않아 경제적인 면에서는 한국전쟁에서 만큼의 큰 이득은 없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으로 한국을 포함한 일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경제 발전의 궤도에 올랐고 일본의 고도성장과 함께 경제 대국화를 받쳐온 국제 환경의 구조를 생각하면 베트남 전쟁이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吉田, 2011: 170-171). 베트남 전쟁은 일본인에게 있어 ‘저 바다 건너 불(海の向うの火事、Fire Across the Sea)’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며, 일본의 역할을 둘러싼 논의 가운데 지적된 것이 ‘침략 가담자’라는 것이다. 일본 국민 사이에서 일본을 ‘평화국가’로 간주하는 자기인식과 민주주의를 내셔널 아이덴티티로 받아들인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이 되었다. 하지만 ‘평화국가’라는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부정할 수 없는 ‘기지국가’라는 현실의 딜레마 속에서 반전평화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베트남 전쟁 기간 중 시민들과 학생들은 각각 베평련(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이라는 비폭력 반전운동과, 신좌익 학생들 중심으로 조직된 ‘전공투(全学共闘会議)’ 운동은 기지 주변의 주민들과 전개하는 운동과 연계하며 일본의 시민사회를 포섭해 나가기 시작했고, 일본내 비판적 사회운동의 성장의 초석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과 인식 속에서 일본 정부는 평화외교의 일환으로 대(對)베트남 원조외교를 펼쳤다. 본 논문에서는 일본 정부의 ‘대(對) 베트남 원조’에 중점을 두어 그 형태와 특징에 대해 모색하고자 한다. 특히 미일 안보조약의 의무적 이행에 따라 미국에 기지를 제공하며 베트남 전쟁에서 가담국 역할을 함과 동시에 원조외교를 펼친 일본 정부의 저의를 파악하고, 베트남 전쟁 기간인 1960년대와 70년대의 ‘대(對) 베트남 원조외교’의 방식을 검토하여 그 방향성을 탐색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본다.
    • 제 목
      미국의 한국수산업에 대한 원조와 수산업의 경제적 성장 및 변화-1950년대~1960년대를 중심으로-
    • 저자
      공미희
    • 발행처
      동북아시아문화학회/동북아 문화연구
    • 발행년
      2022, vol.1, no.73, pp. 77-100 (24 pages)
    This study, first, analyzed the current status and characteristics of US aid to the Korean fisheries industry, and second, how the economic growth and change of the Korean fisheries industry progressed due to this aid, centered on the 1950s and 1960s,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 armistice. Analyzed. The first US aid to Korea after liberation was GARIOA for the purpose of relief, and the fisheries sector accounted for less than 0.1% of the total aid. The government introduced ECA aid in January 1949 to revitalize the industry for the purpose of economic self-sufficiency in Korea. However, with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ECA aid was focused on war relief rather than industrial revitalization, and then it was discontinued and converted to SEC aid. In the SEC and ICA, aid to the Korean fisheries industry was evident, and in particular, UNKRA's total aid to the fisheries industry was 3,657,000 dollars, which accounted for a significant portion. Although the fisheries industry was in a state of stagnation due to the Korean War, the government sought a series of fisheries development policies, including efforts to restore fisheries with the help of US aid and foreign aid organizations. Meanwhile, after the armistice in the Korean War, the restoration of the fishery industry began in earnest. The Ministry of Commerce and Industry has embarked on several revitalization plans to build a balanced industrial structure that can guarantee minimum economic self-sufficiency in the future, including the establishment of a five-year industrial revival plan. In particular, it was possible to learn about the economic growth and change of the Korean fishery industry according to the five plans related to the fishery industry.
    • 제 목
      개혁개방 이후, 화교 자본의 유입과 중국 전통문화의 재건-마조 신앙을 중심으로-
    • 저자
      김경아
    • 발행처
      중국인문학회/중국인문과학 (중국인문과학)
    • 발행년
      2022, vol., no.82, pp. 275-292 (18 pages)
    1978년 개혁개방의 추진과 함께 중국 정부는 화교의 모국에 대한 자본의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경제적 우대조치를 연이어 발표한다. 그리고 중앙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지방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재정분권화 제도를 채택해 시장경제체제의 작용이 확대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푸젠성 정부는 마조신앙조직과의 공조를 통해 타이완 및 화교의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고 인적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를 통해 문화대혁명 기간 파괴되어 단절된 마조신앙의 제의와 종교활동 등을 재건하는 데 주력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마조신앙이 점차 민간종교의 영역에서 전통문화의 영역으로 흡수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푸젠성에서 발원한 마조신앙이 개혁개방 이후 부흥하는 과정을 고찰하고, 이 과정에서 발견되는 특징을 분석하고자 한다.
    • 제 목
      원양어업 종사자의 구술로 본 원양 해역 진출 고찰
    • 저자
      주현희,채영희
    • 발행처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도서문화』 (JIC)
    • 발행년
      2022, vol., no.60, pp. 173-205 (33 pages)
    본 연구에서는 한국 원양어업 개척기 및 발전기의 해역 진출사를 원양어업 실제 종사자의구술 자료를 통해 살펴보았다. 원양어업 종사자들의 새로운 해역 개척의 활약상과 그 과정에서그들이 겪은 어려움을 중심으로 원양어장 개척의 한 단면을 재조명하였다. 당시 수역국 대부분은 한국과 수교가 체결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민간 기업이 주도하여 어업협력 관계를 구축했으며 이것이 국가 간 수교 체결로까지 이어졌다. 한국의 원양어업은 이러한 민간 기업의 어업협력 활동을 통해 새로운 원양어장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정부 기관을 통한 공식적인 외교 활동에 버금가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새로운 어장으로 진출하는 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새로운 원양어장에 대한 정보와 경험 부족 등으로 인해 원양 어선의 침몰 사고로 많은희생이 뒤따랐다. 본 연구는 실제 원양어업 경험자들의 구술자료를 바탕으로 한국 원양어업 개척과 어장 진출의 역사를 살펴보고 한국 원양어업 발전사 이면에 가려진 이들의 희생과 고충을재조명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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